비밀 공간/영혼의 세계

기독교와 이슬람의 영원한 앙숙.

도깨비 보니조아 2009. 1. 14. 19:29

 

기독교와 이슬람의 영원한 앙숙.

 

초조한 여인이 있었다.

76세의 나이에도 자식이 없는 사라. 그녀는 남편에게 이집트인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자식을 낳도록 하는 결정을 내린다.

여종 하갈과 그녀의 남편 사이에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태어난다.

이후 사라에게도 태기가 있어 이삭이 태어난다. 그녀의 남편은 아브라함이었다.

훗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아들을 제물로 바치도록 명한다.

그 아들은 누구였을까? 유대교와 기독교는 이삭이었다고 주장하고 이슬람교는 이스마엘이었다고 주장한다.

두 아들에 대한 상반된 주장은 엄청난 종교적 갈등의 뿌리가 된다.

아브라함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믿음의 조상으로 받들어진다.

이슬람교 역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우리에게 계시된 것과 아브라함과 이스마엘과 이삭과 야곱에게 계시된 것을 믿나이다.’ 라고 기록된 코란을 앞세워 아브라함 이야기를 종교 관행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하지만 원초적으로 아브라함 자체가 증명되지 않은 인물인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성서고고학자들의 공식적인 반응은 “그가 허구의 인물임을 입증할 수 없다.” 이다.

쉽게 말해 진짜 인물이 아닌데 가짜 인물도 아니라는 식으로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신화 속 아브라함에 대한 믿음이 너무 절대적이다 보니 함부로 표현을 못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개념의 의미와 유산을 평가하는 일 정도가 될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역사적 과업을 착수할 것을 명한다.

무슬림들은 그 과업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을 통해 자신들에게 계시되었다고 믿는 반면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물려받았다고 주장한다.

회의론자들은 이렇게 서로 다른 주장에 대해 자기 종족을 미화하기 위해 꾸며낸 허구라고 하기도 한다.

이후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 자체가 소설이라며 인정하지 않는 것이 유대교이다.

기독교는 이후 로마로 건너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급성장한다.

아브라함이 고향에 남아 있는 것이 유대교이고, 예수를 중시조로 내세워 로마로 건너간 것이 기독교이다.

아랍 쪽으로 건너가 마호메드를 중시조 삼아 성장한 것이 이슬람교이다.

예루살렘에서는 지금도 저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들은 살아가고 있다.

성경 기록자들의 시간 개념은 워낙 신축적이어서 아브라함의 가족사에 대한 신빙성에는 한계가 있다.

창세기에서는 노아의 대홍수부터 시작해 노아의 아들 셈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들 자손 대까지 아브라함의 전체 계보가 전개된다.

이 계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는 10대로 수세기에 걸친 역사가 된다.

증거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의 아브라함 존재에 대한 논쟁이 이해가 간다.

종교의 ‘종’자는 마루‘종’자를 쓴다.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최상위의 개념이다.

종교는 믿음이 기본이겠지만 그 믿음에 선행되는 수행이 항상 동반되어야 한다.

기독교 역시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였을 때,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에 물들기 전의 순수한 인간 본연의 영혼인 아담과 하와가 되고자 수행하는 것이 먼저이다.

수행이 없는 믿음은 광신도로 흘러가기 십상이다.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맹점중의 하나이다.

탈레반이 하나님께 인질을 20명도 넘게 보내줬다고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한국의 기독교에서는 인질을 풀어 달라고 기도를 올린다.

하나님은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의 기도를 듣고 누구 편을 들어야 할까?

아니면 기도를 하지 않는 또 다른 소말리아의 인질은 외면해도 좋은가?

편협한 인간의 잣대로 하나님을 함부로 자기중심적으로만 해석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

하나님의 큰 시야는 탈레반의 인질도, 소말리아의 또 다른 억류되어져 있는 선원도 똑 같은 생명이다.

기독교는 종교라는 이름을 앞세우기에 앞서 소말리아의 인질보다

탈레반의 인질만이 부각되는 것 같은 오류를 먼저 바로잡아야 될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해석만으로 가족을 내세워 미 대사관을 찾아다니고 정부를 폄훼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가족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고려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먼저 전 국민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안겨준 원인제공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죄를 하는 것이 먼저다.

앞뒤가 꽉 막힌 막다른 골목길에서 그나마 한 조각의 퍼즐이라도 맞추려고 애쓰고 있는

정부를 믿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라. 그것이 먼저다.

소말리아의 인질에 대해서는 한 마디 벙긋도 하지 않던 찌라시들이

교묘히 파병 쪽으로 몰아가고 있다.

미국의 앞잽이 운운은 하지 않겠다.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아니다.

전쟁의 명분만을 찾고 있는 미국과 그 허수아비 정권에 불과한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놀음에 왜 우리가 박자를 맞춰야 하는가?

이미 우리 정부로부터 인질 값을 받아 챙기고도 의약품하나 전달하지 않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술수에 왜 함께 놀아나야 하는가?

전쟁을 이야기하고자 감정을 앞세우는 것은 너무 위험한 발상이다.

가족들이 몰려다니고 교회가 하나님의 은총을 바란다고 기도회를 하면 할수록

그들의 놀음에 맞장구치는 격이다.

냉정하게 대처하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정부에 신뢰를 보내라. 더구나 정부에 흠집을 내며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은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했다고 하겠다.

잘못된 믿음으로 지구가 둥글다고 하는 학자들을 죽이는 오류를 또다시 범하지 말자.

아브라함의 역사를 인정하고 무조건적인 믿음 이전에 아담과 하와가 되고자 수행을 먼저 하자.
그리고 또 다른 소말리아의 인질을 위해 기도하자. [펌]

 

인질사건이 한창일때의 글,

다소 늦은 글이지만 이슬람과 기독교를 이해하는 의미로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