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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장

도깨비 보니조아 2006. 4. 3. 22:14
자연으로의 아름다운 회귀(回歸), 수목장(樹木葬)
     
  몇 년전부터 우리사회에는 ‘잘 먹고 건강하게 살자’라는 생활코드인 웰빙(Well-bing)문화가 확산되면서 의·식·주 전반에 걸쳐 새로운 산업영역을 만들어 낼 만큼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생명체는 생물학적으로 그 수명의 한계가 있어 언젠가는 생명의 종말을 맞게 됩니다.
일부에서는 이를 웰빙문화의 연장선상에서 웰다잉(Well-dying)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최근에는 이에 대한 저술과 의료서비스도 개발, 보급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번주『e-숲이야기』에서는 웰다잉(Well-dying)의 한 문화로,
산림정책과도 관련이 깊고 최근 정부차원에서는 우리의 전통적 장례문화로 인한 사회적 문제 해결의 대안으로도 적극 검토하고 있는 수목장(樹木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 수목장이란?

수목장은 시신을 화장해 골분(骨粉)을 나무 밑에 묻는 자연친화적 장묘방식의 하나입니다.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자연장 형태로 사람과
나무가 상생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울타리나 비석 등 인공물을 일체 사용하지 않고 단지 'OOO할아버지(할머니) 나무'란 작은 팻말만을 남깁니다. 산림훼손이
전혀 없으며 벌초 등 무덤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되고 살아 생전에 나무(영생목)를 지정, 관리하는 산림보호의 장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스위스와 독일, 일본, 영국 등 수목장 선진국에서는 개혁 정책의 하나로 수목장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 수목장의 시작은 어디인가요?

수목장이 처음 도입된 것은 1999년 스위스에서부터입니다.
매장, 화장 등 장사방식이 자유로운 스위스에서는 수목장이 정부에 의해 시행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아이디어에 의해 시작됐죠.
그 주인공은 전기기술자 출신인 우엘리 자우터씨인데요, 자우터씨는 1993년 죽음을 앞둔 영국인 친구 마이클씨로부터 “내가 죽으면 친구와 함께 할 수 있도록 스위스에 묻어다오”라는 요지의 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에 자우터씨는 친구의 유언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친구의 화장한 골분을 나무 밑에 뿌리면 나무의 거름이 돼 친구와 나무가 영원히 상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골분을 자신이 사는 마메른 뒷동산 나무 밑에 뿌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수목장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후 자우터씨는 수목장에 대한 주민들의 호응이 높자 특허출원을 시도해 6년간의 노력 끝에 1999년
스위스와 유럽 일부 나라에서 ‘프리드발트’ 상표와 수목장림 관리 및 운영기술에 대해 특허를 받아냈습니다. 현재 자우터씨는 독일어로 ‘평화의 숲’이란 뜻의 수목장림 관리기업인 프리드발트(Fried-Wald)사 사장을 맡고 있으며 스위스에는 전국 26개 주에서 55곳의 수목장림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장묘문화와 수목장

최근 우리나라는 묘지로 인해 적지 않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산지를 크게 잠식하는 매장은 물론,
납골당도 무분별한 석골 등의 사용으로 대형화되고 사치스러워지면서 산림과 자연의 훼손, 무리한 비용지출 등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국 분묘 수는 2,000여만 기(서울시 면적의 1.6배,2억9333만평)이며 매년 20여만 기의 묘지와 개인 납골묘가 새로 조성돼 여의도면적(840ha) 이상의 산림이 훼손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국의 시·도 공설 및 공원묘지와 공동 납골당의 수용능력은 오는
2012년 쯤 포화상태에 이를 전망이라고 합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9월 사망한 임학계의 거두 김장수 교수의
국내 첫 수목장(樹木葬)은 환경친화적 새 장묘법으로 우리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고 정부차원에서도 수목장을 제도적으로 활성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즉, 수목장은 묘지로 인한 국토활용의 비효율성을 해결하고
무리한 장례비용으로 인한 과소비를 막아주는 현실적인 효과
외에도 인간이 죽어서 나무에 동화돼 상생하는 뜻 깊은 추모의
의미와 유가족들이 나무를 소중히 가꾸고 보살피는 숲가꾸기의
의미 등 다양한 사회적 효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수목장은 단순한 장례문화가 아니라 인간이 생(生)과 사(死)에 걸쳐 나무와 숲을 통해
자연과 함께 살다가, 죽어서는 그 자연과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자연으로의 회귀라는 점에서 오늘날
장례문화에 비춰 볼 때 의미하는 바가 크다.

 

뼛가루를 자연에 뿌려 장례를 치르는 ‘에코 다잉(eco-dying)'이

새로운 장례문화로 정착되고 있는 가운데

경기도가 전국 광역자치단체로는 처음으로 수목장림 관련 조례를 입법 예고했다.


수목장은 화장한 뼛가루를 수목에 거름처럼 넣어줌으로써 그 나무와 함께 상생한다는

자연회귀의 섭리에 근거한 장묘법으로 1999년 스위스에서 시작된 이래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 뉴질랜드, 일본 등으로 급속히 전파되고 있다.


이미 화장률이 48%를 넘어선 우리나라에서도 점차 호응을 얻고 있다.

자신이 사는 집 주변에 묘지가 있다면 누가 좋아하겠으며

고인의 생전에 효를 다하지 못하고 사후에 화려하게 꾸민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묘지는 싫어하면서도 자기 조상의 묘소만은 더 크고 화려하게 꾸미려는 이중성이 문제다.

그 것은 다름아닌 후손의 과시에 불과하고 자연의 훼손을 부채질할 뿐 도리는 더욱 아니다.

당초 늘어나는 묘지로 인해 더이상의 산림 훼손을 막자는 취지에서 납골당 안치가 시작됐지만


지금은 오히려 매장보다 더 심각한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고 한다.

묘지는 돌보지 않을 경우 금방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납골분묘의 경우 지나친 석물들로 인해 세월이 가도 없어지지 않는 심각한 폐해를 불렀다.


더 크고 웅장한 구조물을 조장하는 석물 업자들의 상술과

생색이나 내려는 일부 후손들의 그릇된 과시욕이 빚은 또 하나의 실패작이 아닐 수 없다.

이제라도 가장 친환경적인 장례문화인 산골방식이나 수목장을 적극 도입해야 할 때다.


후손들에게 묘소를 관리하게 하는 것 자체가 짐이고 부담이다.

앞으로 예전과 같은 조상 돌보기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죽어서라도 이승에 짐은 남기지 않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초연한 자세가 아쉽다고 하겠다.


도리(道理)는 죽고 난 뒤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하는 것이다.

호화 봉분이나 석물로 조상의 덕을 기릴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부터 고쳐야 한다.

내 조상의 묘소나 석물이 과연 남에게도 애착이 가고 위안을 줄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보자.

 

수목장을 나름대로 정의한다면,
화장을 한 후, 유골을 나무아래 묻어 나무와 숲과 영생한다는,
자연 친화적 장례 방법이라고 할까.
작년, 고려대 교수를 지낸 원로 임학자 김장수박사의 장례가 수목장으로 치러졌었다.
고려대 농업연습림의 50년생 참나무 아래 묻혀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그 나무에는 '김장수 할아버지 나무'라는 표찰이 붙었다.
그 나무는 영혼을 이어가는 영생목(永生木)이 된 것이다.
세계에는 나라마다 각각 다른 장례 방법이 있다.
우리나라는 조선 중기 성종때 부터 유교식 장례법인 매장이 보편화 되어 왔다.
그런데, 매년 여의도만한 넓이의 묘터가 늘어 나고 있는 것이다.
매장 관행은 더 이상 묘지를 쓸 땅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연 경관이 파괴되고 매장 비용도 만만치 않은 폐해가 있다.
그동안 다행히 국민의 인식이 바뀌고 있어서, 최근 설문 조사에서는 화장을 하겠다는 사람이 60% 정도가 된다는 통계가 나왔다.
화장 후 유골을 보관하는 납골묘나 납골당 같은 시설도 2012년이면 포화상태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납골당조차 매장 분묘보다 환경을 더 파괴하고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호화시설로 만들어지고 있고, 사설 납골시설의 경비도 만만치않다.
서구의 많은 나라들은 환경 친화적으로 묘지공원을 가꾸고 있다.
몇해 전, 파리에 갔을 때, 프랑스의 묘지문화를 엿보고 싶어서 메트로를 몇 번씩 갈아타고, 파리지엥들의 자국어에 대한 높은 자긍심 덕분에, 초라하기 그지없는 불어를 구사해 가며, 공설 묘지를 찾아가 본 적이 있다.
영화나 TV에서 보았던, 묘지라기 보다는 잘 가꾸어진 정원같은, 우거진 나무와 꽃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묘지.....
그 곳에선, 망자들이 산자 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끊임없이 나눠 주고 있었다.
영국의 마을 묘지에선 유골을 묻고 나서 그 자리에 장미를 심고, 가지에 작은 명패를 매어 두면 그것이 곧 묘지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한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몇 년 전부터 수목장이 퍼져 나가고 있다 한다.
일가족의 영생목이 모여서 아름다운 가족 정원이 꾸며진 것을 상상하면 더 이상 아름다운 묘지는 세상에 없을 것 같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장례가 수목장으로 치러지는 것을 보고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은 뇌리 속에 자연스럽게 자연과 하나 되는 인간의 삶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할아버지, 할머니의 영생목에 꽃이 필 때, 잎이 무성해 질 때, 낙엽이 질 때, 아이들은 그 나무를 쳐다보며, 나무를 안아보며, 그들의 조부모을 만나고 느끼고 추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창조물인 자연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또 하나 선택의 고민이 추가된다.
나의 영생목은 어떤 이름의 나무로 할까?.....

 

이런 장례문화, 수목장(樹木葬)
어느 생리학자는 말한다.

 사람은 나서 낳고 죽는 존재라고. 참으로 간단한 정리다. 하지만 이 과정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연과 인연들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태어나서 2세를 낳고 죽어가는 게 인간의 운명이라면 죽음은 삶의 종결에 불과하다. 죽음은 모든 생의 마감이다. 죽음으로써 인간은 제로베이스 상태로 간다. 그러나 산 자는 죽은 자를 그렇게 단정 짓지 않는다.

 상례와 장례문화는 바로 그 대표적인 증거가 된다. 상례가 시신을 처리하는 일 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의 영혼을 처리하는 과정, 죽은 사람과 관계가 있었던 살아있는 사람이 시신의 처리과정 전후에 치르는 하나의 연속된 절차라면 장례는 단순히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만을 말한다.

 어찌됐든, 죽음에 대한 산 자들의 태도는 상례나 장례 과정에서 반영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장례문화는 시신을 땅에 묻거나, 불에 태워 처리하는 매장과 화장이다. 이외에도 나뭇가지나 풀밭위에 시신을 바람으로 썩히는 풍장이나, 물 속에 버리는 수장, 돌 등으로 묻는 방식도 있다.

 이런 다양한 장례방식은 사회적 관습이나 종교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인에게 깊이 인식되어온 장례방식은 매장이다. 그러다 보니 전국 산야에 묘지 투성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이 아니라, 삼천리 적막강산이다. 이러한 추세로 가면 전국토가 무덤화될 날이 머지 않다. 한 러서치 기관에서 장묘문화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 현 장묘문화에 대해 84.9%가 심각하다고 답변했다. ?봉분으로 채워지는 국토에 대한 우려다. 이런 결과 선호하는 장례방법으로 화장이 매장보다 앞서 이전과는 변화된 의식을 보여줬다.

 몇 년 전 모 그룹 총수의 유언에 따라 유족들이 화장으로 한 후로 화장 유언 운동이 시민단체와 종교계 등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다.

 국토를 더 이상 무덤화시키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다. 전래의 전통의식 가운데 하나인 매장방식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부정하는 일이며, 산 자처럼 온전한 모습으로 영결해 내세에도 온전한 삶을 기원하는 우리의 뿌리 깊은 영생주의관이다.

 묘지나 납골당에 안치된 고인의 흔적을 정성껏 살피는 까닭은 그곳이 고인의 영혼이 깃든 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굳이 묘지나 납골당이 아니라 주검의 흔적을 어느 특정한 나무에 뿌리는 방식도 고려할 봄직하다. 이른바 수목장(樹木葬)이다.

 수목장으로 할 경우, 고인의 의미도 새기고 나무를 돌보면서 자연도 관리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또한 내가 죽어 생명에 거름이 되는 일은 결국 순환론적 세계관, 영생주의라는 우리의 뿌리 깊은 의식에 닿아 있기도 하다. 우리도 언젠가는 지상을 떠나 죽음을 맞는다. 그렇다면 죽음을 기억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