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공간/영혼의 세계

유대인 이야기 6

도깨비 보니조아 2010. 2. 25. 21:15
[유대인 이야기] (57) 동상이몽(同床異夢)
 
‘약속의 땅’ 복귀 꿈꾸지만 …
 
 
- 1881년 이후 러시아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혹독한 박해가 자행됐다. 박해는 러시아뿐 아니라 유럽 각국에서도 벌어졌다. 그림은 러시아 등 동유럽에서 자행된 유대인 박해에 대한 묘사(위)와 1903년 키시네프에서 일어난 박해로 희생된 유대인 아이들(아래).
 

‘약속의 땅’ 돌아가려는 시오니즘
저마다 다른 신념의 벽에 부딪혀
 
 
여기서 잠깐, 1800년대 후반에서부터 1900년도 초반까지의 당시 유럽 유대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프랑스에선 드레퓌스 대위 사건을 통해 유대인들의 불편한 입지가 확인됐다. 그렇다면 다른 유럽 사회의 유대인들은 어떤 처지에 있었을까.
 
1881년 러시아의 황제가 죽었다. 유대인들이 황제 살해에 관여됐다는 소문이 퍼졌다.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100여 개가 넘는 유대인 정착지가 폐허가 됐다. 실정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를 유대인들에게 돌리는데 성공한 러시아 제정은 이후 유대인 학대에 대한 법적 근거를 착착 마련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의 직업과 거주이전의 자유가 제한됐다. 유대인들은 견딜 수 없었다. 1881년부터 거의 매년 5만여 명이 러시아를 탈출했다. 1891년에는 11만 명, 1892년에는 13만 명이 러시아를 떠났다. 1905년과 1906년 대학살 기간에는 무려 20만 명의 유대인들이 러시아를 탈출했다. 복수심에 불탄 청년 유대인들은 제정 러시아 붕괴를 위한 사회주의 혁명에 뛰어들었다.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러시아뿐이 아니었다. 1881~1894년에 총 80만~1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오스트리아와 루마니아를 떠났다.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영국도 유대인 범죄가 증가하자 수많은 유대인 죄수들을 호주로 강제 이주시켰다. 찰스 디킨스(Charles John Huffam Dickens, 1812~1870)의 장편소설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가 유대인들을 악인으로 묘사하는 듯한 이미지를 보이는 것도 당시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러시아 등지에서 탈출한 유대인들이 선택한 새로운 땅은 프랑스와 독일 등 동유럽과 미국, 그리고 팔레스타인이었다. 특히 프랑스에는 12만 명의 유대인들이 몰려들었다. 유대인들은 프랑스는 자신들을 받아줄 것이라고 믿었다. 프랑스는 혁명(1789)을 통해 ‘자유, 평등, 박애’를 부르짖었던 나라였다.
 
하지만 프랑스도 냉랭했다. 드레퓌스 대위 사건이 단적인 증거였다. 당시 프랑스에선 유대인을 비판한 「프랑스 유대인」(에두아르 드뤼몽, 1886)이라는 책이 100만 판 이상 팔려나가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절망했다.
 
이제 유대인들은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었던 이탈리아도 1861년에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 통일국가를 세웠다. 유대인들은 “우리도 한번?”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때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 운동이 일어난다.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은 “반유대주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유대민족이 다른 민족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려는 노력은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착오”라고 생각했다. 그는 「유대인 국가」(Der Judenstaat, 1896)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유럽 사회와 통합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우리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오직 하나, 신앙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방인 취급을 받고 있다.”
 
헤르츨의 주장은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1897년, 그해 8월 29일 스위스의 바젤에서 1차 시오니즘 대회가 열렸고, 수많은 이들이 주목했다. 가난하고 소외된 유대인들이 시오니즘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헤르츨 주위에 젊고 다혈질적인 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 같은 움직임에는 반유대주의자들도 찬성했다. 자신들의 나라에서 유대인들을 쫓아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러시아 내무장관 벤젤 폰 플레베(Wenzel von Plehve)는 “우리는 700만 명의 유대인들을 흡수할 수 있는 독립된 유대인 국가가 탄생하기를 매우 고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오니즘은 곧 난관에 부딪힌다. 우선 시오니즘에 찬성하는 유대인 내부에서부터 의견이 엇갈렸다. 시오니스트 중에는 사회주의자, 자본주의자, 종교적 성향이 강한 자, 민족주의자 등이 혼재했다. 신념이 다르면 함께 할 수 없는 법이다.
 
게다가 시오니즘 자체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우선 유럽 각국의 부유한 유대인들이 이에 반대했다. 랍비 등 종교 지도자들도 시오니즘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시오니즘은 기득권층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많은 희생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또한 시오니스트 중 상당수가 사회주의자 등 무신론자였던 점도 걸림돌이었다. 이미 성공한 유대인들은 작은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사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특히 독일 유대인들은 독일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독일에서 태어나고 독일에서 자라난 사람들이었다. 독일에서 성공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시오니즘은 해결책이 아니라 비겁하게 도망치는 것이었다. 독일민족과 유대민족의 통합은 가능하다는 취지에서 ‘유대계 독일 중앙협회’(CV)가 1893년 베를린에서 창립됐다. 이들은 독일 유대인의 충성심은 독일을 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당시 독일은 유럽, 아니 전세계에서 고도의 문화를 자랑하던 국가 중 하나였다. 단연 돋보였다. 범죄율이 유럽국가 중 가장 낮았다. 국민 대부분이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나라는 당시로선 독일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 세계 최고의 대학은 모두 독일에 있었다. 유능한 유대인들이 독일로 몰려들었다. 독일이 학문연구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33년까지 독일은 전체 노벨상 수상자의 30%를 배출했다. 그 수상자의 30%가 독일계 유대인이었다. 특히 의학분야 노벨상 수상자 중 유대인은 독일 전체 노벨상 수상자의 50%에 달했다. 스포츠와 관련해서도 독일 유대인들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전 20년 동안의 올림픽에서 13개의 금메달과 3개의 은메달을 고국에 안겨주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일 유대인들은 대부분 독일을 지지한다는 탄원서에 서명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박해했던 러시아를 조국(독일)이 단단히 혼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1914년 탄넨베르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한 독일군이 러시아 지배하에 있었던 폴란드에 왔을 때, 해방군으로 환영했다. 독일군 병사들은 환영하기 위해 몰려드는 유대인 아이들에게 사탕과 과자를 나눠 주었다.
 
그랬던 독일이…, 돌변한다.
 
[가톨릭신문, 2010년 4월 25일, 우광호 기자]
 
[유대인 이야기] (58) ‘목놓아 쏟는 통곡’의 전주곡
 
2차 대전 발발 … ‘쇼아(대재앙)’ 점차 현실로
 
 
-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 결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일어났다. 1933년 1월 30일, 어머니를 땅에 묻은 이후 단 한 번도 운적이 없다는 히틀러가 독일 제국의 총리로 임명됐다.
 
 
히틀러, 독일인 재결집 위해 거짓 선동
뉘른베르크법 제정 유대인 학살 도모
 
 
사람들은 흔히 ‘홀로코스트’(Holocaust)라고 알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그리스도교 유럽 사회가 선택한 표현이다.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히브리어인 ‘쇼아’(ha-Shoah,השואה)라는 말을 쓴다. 홀로코스트는‘신에게 바쳐진 제물’‘불에 타버린 번제물’이라는 어원에서 나왔고, 쇼아는 ‘대재앙’을 의미한다.
 
1933년부터 1945년 1월 27일 폴란드 아우슈비츠 유대인 포로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학살되었는데, 이는 인간의 폭력과 광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20세기 인류 최대의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유럽사회는 이러한 치욕을 그대로 드러내는 ‘쇼아’라는 말보다는 ‘번제물’이라는 고상한 의미를 지닌 ‘홀로코스트’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피해 당사자인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쇼아’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 말 그대로 대재앙이었다.
 
그 뿌리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패전국 독일은 1919년 6월 28일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연합국과 조약을 맺는다.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이 그것이다. 이 조약으로 인한 독일의 피해는 막대했다. 일본이 훗날 전후 보상 과정에서 입었던 미미한 피해와는 대조적이다. 독일은 식민지를 잃었고, 알자스 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하였으며, 자국 영토도 잃었다. 국토 면적은 13%, 인구는 10%가 줄었다. 일본은 패전 후 자국 영토도, 국민도 잃지 않았다. 또 독일은 전쟁 도발의 책임으로 연합국에 막대한 배상을 해야 했고, 이로써 경제가 급속히 악화됐다. 게다가 1929년 미국발 경제 공황은 독일 경제를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절망의 나락으로 내몰았다. 독일인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쥐도 구석에 몰리면 무는 법이다. 연합국은 마지막 숨통은 조이지 말았어야 했다. 궁지에 몰린 독일 국민들은 이제 ‘될대로 되라’식이 된다. 극단적 이데올로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응어리진 마음을 확 풀어줄 정치를 요구했다. 전쟁 이전만 해도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법이 잘 지켜지던 국가였다. 하지만 전쟁은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다. 이제 독일은 폭력이 만연한 국가가 된다.
 
이런 와중에 결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일어난다.
 
미국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가 3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세계 최초로 아이스크림 콘이 발명되고, 한국의 고은 시인과 일본의 125대 아키히토 천황이 태어나던 그 해였다.
 
1933년 1월 30일, 스스로 “어머니를 땅에 묻은 이후 단 한 번도 운적이 없다”고 말한 그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독일 제국의 총리로 임명된다. 유대인에 대한 강한 개인적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히틀러는 국민들의 울분을 해소할 대상으로 유대인을 이용했다. 유대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연설은 전후 비참한 독일의 속죄양을 찾고 있던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순진했다. 쾰른에서 상점을 운영하고 있었던 한 유대인 상인은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태평스럽게 이런 말을 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은 독일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도 독일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독일인의 신의를 믿습니다.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히틀러의 생각은 달랐다. 일부 유대인들이 운영하던 매매춘 사업과 당시로선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았던 매독(syphilis)을 연결시켜 유대인들이 게르만 민족의 혈통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성적 접촉을 통해 독일 민족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선동이 독일 국민들에게 통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1935년에 유명한 뉘른베르크 법이 제정된다. 유대인 학살의 최초 법적 근거가 된 이 법은 독일인과 유대인을 철저히 분리시키는 법이었다. 이 법의 전문은 독일 혈통의 순수성을 독일 민족이 존재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법 내용을 보면 기가 막힌다. 1조 1항에서는 독일인과 유대인의 결혼을 금지했다. 독일내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의 결혼도 무효화했다. 독일인과 성관계를 가진 유대인은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성관계를 맺은 독일인도 3개월 동안 정신 교육을 받아야 했다. 4조 1항은 점입가경이다. 이 조항은 유대인이 독일 국기를 게양하는 것을 금지했다. 법을 어긴 자는 강제노동형에 처해졌다. 유대인은 더 이상 독일 국민이 아니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간다. 193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으로 오스트리아 유대인들도 독일법의 적용을 받게 됐다. 모든 유대인 남자는 공식 문서의 이름과 성 사이에 ‘이스라엘’을, 여자는‘사라’를 써 넣어야 했다. 유대인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10월에는 모든 독일 유대인의 신분증이 회수됐다.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수많은 독일 유대인들이 인접한 폴란드로 피난길에 올랐다. 하지만 폴란드는 국경을 열어주지 않았다. 1만 5000여 명의 유대인들이 국경에서 노숙을 하며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이때 엄청난 사고가 터진다. 17세의 한 청년 유대인이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의 참사관을 살해한 것이다. 독일의 유대인 학대에 대한 한 젊은 청년의 항거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독일에게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할 핑계거리로 작용했다. 1938년 11월 9일과 10일 이틀 사이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있었던 수백여 곳의 회당이 불에 타고, 8000여 곳의 유대인 상점이 약탈당했으며, 2만 5000여 명의 유대인들이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 유럽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공격으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포성이 폴란드를 뒤흔들었다.
 
그 포성은 목놓아 쏟는 통곡(cry unrestrainedly)의 전주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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