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기해박해 (헌종5년 서기 1839년)
( 1838년부터 1840년까지 3여년에 걸친 박해 )
1834년 재위 34년 만에 순조가 돌아가시고 불과 8세의 어린 몸으로 왕위에 오른
분이 바로 헌종이다.
국왕이 나이가 어려 순조비였던 순원왕후의 수렴정치가 시작되었고, 처참한
박해가 시작된 것은 1839년 이지연이 집권하면서 부텨였으며 이 때 바로 79위
복자중 70명의 순교 복자를 낳게 되었다.
그만큼 박해는 계획적이리 만큼 엄하고 잔인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기해 박해라 하여 반드시 기해년(1839년)에 벌어진 것은 아니다.
1838년부터 1840년까지 3여년에 걸친 박해이다.
헌종 5년에 우의정 이지연을 중심으로 대박해가 착수케 되는데 이때 소위
묘당회의가 있었다. 순원왕후 김대비를 모시고 어전회의가 열렸을때,
좌포장 남헌교가 사교금압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고 우의정 이지연이 이를
저지하여 엄벌을 내세웠다.
그 결과, 김대비는 ’사학을 일삼고 있는 천주교인들을 한사람도 남김없이
없애버리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로울뿐 아니라 온 인류가 멸망할 것이다.’
라고 명을 내렸고 양력 4월 20일에 정식으로 박해 법령시 천하 또한, 박해령이 내린 후 최초로 순교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바로 정 쁘로따시오
인데, 그는 1839년 4월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다가 견디다못해 배교를 함으로써
풀려났으나, 즉시 뉘우치고 스스로 관가에 출두하여 배교를 취소하고 처벌을
요구하기도 했다.
또한
15세의 어린나이에 순교한 복자 이정희 발바라, 그녀는 어려서 부모를 여읜 고아의
몸이었으나 열심한 교우였던 그의 아주머니 순교자 이 막달레나와 이 발바라의
훈도로 열렬한 신앙생활을 하다 그만 검거되어서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비위생적인 감방에서 그만 염병이 옮아 1주일동안 병고에 시달리다
귀천하였다.
기해 박해때 순교하신 세분의 성직자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땅 신부가
순교하였다. 세분의 성직자는 군문효수의 선고를 받고 한강변 새남터에서
집행하였다. 20여일이 지난후에 삼성산에 모셔졌고 명동성당(1901년)을 거쳐
지금은 양화진 성당에 모셔져있다.
1839년 9월 21일 3분의 성직자가 순교하신 다음날 정하상,유진길 참수 당하심.
9. 흥선 대원군과 병인 박해 (고종3년 1866년)
병인 박해란 고종3년 즉, 1866년에 벌어진 교난을 말하는 것이다.
고종8년인 1871년까지 전후 6개년간의 박해이며 공식적으로 기록된 순교자 수만도
2천여명이나 되며 비공식적으로 살육당한 신자 수까지 합하면 8천여명의
희생자를 낸 대 박해 사건이며 우리 교회 사상 일대 시련 이었다.
대원군 아니, 흥선 대원군 그 정식 이름은 이하응 이라는 분이다.
집권케 되는 것은 1863년 말에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게 되자,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 나이 불과 12살에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서다.
이 국왕이 바로 고종이며 국왕이 유소하매 흥선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이후
민비를 중심으로한 민씨 일파의 공작으로 양주( )로 하야( )할 때까지
전후 10년간 집권자로 행세하였다.
대원군의 천주교에 대한 두가지 추측
호감을 가졌다고 추측되는 내용
첫째 : 승지 남종삼과의 문답 즉 천주교회에 관해 문답할때 그로
부터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받음. (제사에 관한 문제에만 의심을.......)
둘째 : 대원군의 부인인 민부 대부인의 천주교 동경자였다는 사실
셋째 : 그 유모가 일찍부터 천주교인 이었다는 사실
넷째 : 대원군의 맏딸인 이씨부인이 천주교도였다는 그 자손들의 주장
포악한 탄압령을 내려 8천의 생명을 희생시키게 되었던 일반적인 사유
첫째 : 보수적이며 포악하고 잔악한 성품이 그릇된 정세를 판단한점
둘째 : 러시아 세력 남침에 따른 외교정책의 난 문제
셋째 : 대원군의 면회 신청에 즉응하지 못했던 교회의 사정
넷째 : 유고적 양반 세력과 조 대왕대비 일파의 음모공작.
다섯째 : 청국에 있어서의 천주교 박애 운동
대원군이 후세에 가장 비난받은 이유는 천주교인의 대량 학살은 그가 교리에
대한 몰이해나 천주교에 대한 반감보다도 제정 러시아의 남침이 중요한
동기가 된다. 대체로 대원군이 천주교회측과 교섭을 가지게 된 것은 러시아
남침에 대비키위한 셈이었다.
병인박해는 병인양요를 초래했다.
그러나, 프랑스 군이 대패로 끝나자 대원군은 더욱 의기양양해서 척화비를
세우고 천주교도인의 색출은 더욱 격심해 졌다.
그런 흥선 대원군도 정계에서 물러난 후로는 점차 천주교에 대한 심경에
변화가 생겨나 그의 말년인 1896년 10월에 괼아라는 영명으로
영세할때 반대하지 않고 묵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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