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공간/영혼의 세계

믿음에서 출발하라.

도깨비 보니조아 2009. 7. 30. 16:00

 

스님은 법상에 올라가 설법했다.

“대개 도를 배우러 하는 이는 믿음으로써 출발해야 한다.

그러므로 경전에는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가 되어 일체의 선법(善法)을 길러낸다.’ 하였으며 ‘믿음은 지혜와 공덕을 늘리고, 믿음은 반드시 여래(如來)의 자리에 이르게 한다.’ 하였다.

만일 확고한 믿음이나 뜻을 세우지 않고 반은 믿고 반은 의심하거나, 반은 나아가고 반은 물러난다면 지혜를 증득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도 ‘두 갈래 길에 선 사람이 어느쪽 길이 맞는지를 의심하기 때문에 선뜻 택하지 못하는 것처럼, 진리의 길에 대해서 의심을 내어 선뜻 택하지 못한다면 이는 어리석음에서 생기는 일이므로 나쁜 것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리라.’ 하였다.

그러므로 출세간(出世間)의 큰 인물이 되려면 모름지기 척추를 세워 단단한 것은 강철을 녹이고 두들겨서 만들듯이 나약한 마음도 내지 말고, 물러설 마음도 내지 않아야 조금은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도위(李都尉)의 게송에 이런 구절이 있다.

  
도를 배우려면 철한(鐵漢)이 되어야 한다.
   손을 대고 판단하여
   바로 더 없는 보리(菩提)를 취하고
   일체의 시비에 간섭하지 말라.


여기서 말한 ‘더 없는 보리’란 이름이나 모양을 떠났으므로 헤아릴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

그러나 처음으로 공부하는 이들을 위해 방편으로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옛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요함(寂)과 비춤(照)이 둘이 아닌 것이 보리의 성질이다.

마치 맑고 고요한 유리가 본체가 되고, 밝게 비추는 것이 작용이 되지만 이 둘이 합쳐서 거울이라는 성질이 된 것과 같다.’

또 이렇게 말했다.
‘맑은 구슬을 볼 때 구슬은 본체요, 맑게 비추는 것은 작용이다.

사람의 마음도 그와 같다. 고요한 것은 마음의 본체요, 무엇을 안다는 것은 작용이다.

그러나 고요한 것과 안다는 것이 결코 둘이 아닌 것이 마음의 성질이다.’

또 어떤 조사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을 헤아리지 않으면, 절로 생각이 끊어진다.

생각이 끊어지면 항상 고요한 마음의 본체에 들어가게 된다.

마음의 본체는 항상 고요하지만 고요한 마음이 헤아릴 수 없는 작용을 한다.’

또『기신론(起信論)』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생각이 끊어진 상태는 허공과 같아서 법계(法界)에 두루 편만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법계의 삼라만상이 바로 여래의 평등한 법신(法身)이다.’

그 러므로 생각이 끊어진 법을 깨친 이는 모든 법을 통하게 되고, 생각이 끊어진 법을 깨친 이는 모두 부처의 경계를 보며, 생각이 끊어진 법문에 들어간 이는 그 찰나에 부처가 된다.

만약 마음을 일으켜 도를 구하면 한갓 마음을 괴롭힐 뿐이다.

그러므로『화엄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법의 성품은 본래 비고 고요하여
   취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
   성품이 빈 것이 부처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이렇듯 잠깐 동안도 생각을 일으켜서는 안 되는데 어찌 오래도록 마음을 괴롭혀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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